안나(2022), 거짓으로 쌓아 올린 정체성의 구조

 

안나(2022) 드라마 포스터 이미지

안나(2022)는 한 인물이 거짓말을 선택하는 순간보다, 그 거짓이 어떻게 하나의 정체성으로 굳어 가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드라마입니다. 이 작품은 거짓을 단순한 도덕적 결함이나 일탈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거짓이 어떤 조건에서 시작되고, 어떤 구조 안에서 반복되며, 결국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대신하게 되는지를 차분하게 보여 줍니다. 저는 이 점에서 안나가 범죄 드라마나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왜 거짓을 선택했는가”보다 “왜 그 거짓이 멈추지 않았는가”에 있습니다. 작은 선택 하나가 어떻게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그 선택들이 쌓이면서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지 분석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이 글에서는 안나가 거짓으로 정체성을 쌓아 올리는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정체성이 결핍에서 욕망으로 이동하는 출발점

안나의 거짓은 충동적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 출발점에는 분명한 결핍이 존재합니다. 이 결핍은 단순히 경제적 부족이나 사회적 지위의 문제를 넘어, 스스로를 증명받지 못했다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안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한 채 살아왔고, 그 공백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때 욕망은 자연스럽게 발생합니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인정받는 정체성에 대한 욕망,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겹쳐지며 하나의 방향을 만듭니다. 중요한 점은 이 욕망이 과도하거나 비현실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안나의 욕망은 사회 안에서 충분히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제시됩니다. 그래서 거짓은 비도덕적인 선택이기 이전에, 현실적인 탈출구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안나가 처음 선택한 거짓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소하고, 들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작은 선택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거짓은 기존의 삶을 조금씩 밀어내며 새로운 자리를 차지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드라마가 매우 냉정하다고 느꼈습니다. 거짓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결핍을 견디기 위한 임시방편처럼 등장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쉽게 반복됩니다.

정리하면, 안나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거짓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결핍을 메우기 위한 욕망이 선택을 만들고, 그 선택이 정체성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 과정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편한 현실감을 남깁니다.

거짓이 반복되며 하나의 삶이 되는 과정

안나에서 거짓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점점 ‘사실처럼’ 기능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반복되면 설명이 필요해지고, 설명은 다시 새로운 거짓을 요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거짓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유지해야 할 체계가 됩니다. 안나는 이 체계 속에서 점점 더 많은 것을 걸게 되고, 그만큼 빠져나오기 어려워집니다.

주변 인물들의 반응 역시 거짓을 고정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은 진실보다 보이는 정체성을 먼저 믿습니다. 말투, 옷차림, 배경, 관계는 사실 여부보다 신뢰를 형성하는 요소로 작동합니다. 안나는 이 구조를 의식적으로 활용하기보다, 그 안에 자연스럽게 적응해 갑니다. 이 적응 과정이 바로 거짓이 삶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 시점에서 안나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과거의 자신은 점점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고, 현재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저는 이 변화가 매우 아이러니하다고 느꼈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시작한 거짓이, 결국 가장 강력한 족쇄가 되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는 이 과정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일상의 반복 속에서 거짓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스며드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담담한 연출 덕분에, 시청자는 안나를 비난하기보다 그 선택의 무게를 함께 느끼게 됩니다.

선택의 누적이 만들어낸 정체성의 균열

거짓으로 쌓은 정체성은 완벽해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항상 균열이 존재합니다. 안나는 그 균열을 감추기 위해 더 많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들은 점점 더 큰 비용을 요구합니다. 관계에서의 불안,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 순간들이 반복되며 정체성은 서서히 흔들립니다.

이때 드라마는 안나에게 단순한 응징이나 교훈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과연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거짓으로 쌓은 삶이 너무 멀리 와 버렸을 때, 진짜 정체성은 이미 사라진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안나가 마주하는 균열은 외부의 폭로보다 내부의 붕괴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게 되는 순간, 정체성은 더 이상 보호막이 아니라 공허함이 됩니다. 저는 이 결말부의 정서가 매우 차갑고 현실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거짓의 대가는 처벌보다 공허함일 수 있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남기 때문입니다.

안나(2022)는 거짓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드라마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거짓이 어떻게 구조가 되고, 그 구조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대신 살아 버리는지를 보여 줍니다. 정체성을 쌓아 올리는 과정이 곧 무너질 위험을 함께 쌓아 올리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매우 불편하지만 동시에 설득력 있는 질문을 남깁니다.

결국 안나는 “진짜 나”란 무엇인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타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이 과연 나의 삶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삶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안나는 단순한 서사보다 오래 남는 드라마로 기억됩니다.